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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 / 마왕데온 / 리티님(@Delove_0109)
*저그인 합작 글, 7대 주선 7대 죄악에서 색욕 마왕님으로 참여했습니다.
*마왕데온 커플링 요소가 나옵니다. (bl입니다, 사랑을 암시하는 서술이 나오니 거북하시면 뒤로 가시기 바랍니다. )
*15세를 생각하고 작성하였으나 생각보다 건전합니다?(그치만 욕망을 다루기 때문에 너무 어린 분들은 읽는 걸 지양해주세요.)
* 급전개 주의: 필력이 별로라 급전개가 많습니다.
*트리거 요소: 종교적인 이야기를 토대로 다루며 감옥, 마녀 사냥 류의 이야기도 나오니 거북하시다면 뒤로 가기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자체 필터링 했지만 욕도 있어요.(+적폐 캐해: 진짜 적폐인 게 저그인 세계관과 작가님의 차기작 세계관을 뒤흔들어 버릴 적폐가 하나 존재한답니다. 이게 스포라서 설명도 못 하겠어요. 스핀오프 보는 느낌으로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들어온 달빛이 은은하게 성당 내부를 비춘다. 작은 빛에 의지하여 둘러본 대기도실의 가장 앞쪽에 베일을 쓴 남성이 두 손을 모아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 경건하고도 신성한 모습을 감상하기도 잠시 기척을 느낀 듯 베일을 쓴 남성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따라서 베일 아래로 감춰져 있던 붉은 눈이 선명히 드러났다.
"왔어요?"
베일을 쓴 남성이 눈꼬리를 접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거치적거리는 베일을 뒤로 넘겨 버리자 백발이 움직임에 따라 흐트러졌다. 백발 적안, 흔하지 않은 두 색을 가지고 태어난 신비로운 미형의 남성.
'장난감 하나는 잘 골랐다니까. '
그 사실이 만족스러워 그를 마주 보며 손을 흔들어줬다.
"안녕, 데온."
"..."
데온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베일을 내팽개친 우리 성직자님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더니 짜증스럽게 물었다.
"오늘이 마지막인 거죠?"
"...그렇지?"
"...확실하게 말씀해주시죠."
"그럴 거야."
"...뭐, 좋습니다."
긴 소매에 숨겨져 있던 하얀 손이 눈앞에 내밀어 졌다. 데온의 손을 잡고 예의 그 공간으로 이동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했다. 풍경이 바뀌었다. 도착한 곳은 거대한 쇠창살 앞. 불도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어둠 속 서늘한 공간, 마법으로 불빛을 만든 마왕을 따라 데온의 시선이 함께 이동한다.
쇠창살 안쪽에서도 이쪽을 의식한 듯이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온?"
"......형."
데온이 쇠창살을 꾹 잡고 미끄러진다.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떨군다. 퍽 비참한 모습에 시선을 거두었다. 창살 속 인물이 다가오는 듯, 바닥을 쓰는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데온, 바닥이 차."
"혀엉...괜찮아, 난. 형이 더!"
"데온, 네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그치만 나 때문이잖아?"
자책하는 데온의 말을 끝으로 감옥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데온의 형, 크루엘이 눈을 틀어 마왕을 바라본다. 방해꾼을 보듯, 불편한 기색을 담은 눈을 본 마왕이 조소를 흘렸다.
'데려와 준 게 난데 경계하는 꼴이 우습네.'
내가 심기가 뒤틀려 데온만 두고 돌아가 버리면 어쩌려고. 그걸 알아서 눈만 부릅뜨고 경계하는 걸지도 모르겠군. 뭐, 이 일도 마지막이니까.
마왕은 크루엘의 앞에서 고개 숙여 울먹이는 이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곳에 데려다 주는 것을 조건으로 거래를 내건 이를. 곧 내 손에 들어올 장난감을 위한 시간을 방해할 이유는 없다. 긴 속눈썹에서 시작해 창백한 볼을 타고 흐르는 맑은 눈물, 위태로운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해 절규하는 데온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왕이 입맛을 다셨다.
"형제끼리의 이야기를 방해할 수 없으니 난 잠시 나가 있을게."
"이야기가 끝나면 불러, 데온."
데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통신석을 건네준 마왕이 공간 이동을 했다. 건네준 통신석과 연결된 통신석을 손에 쥔 마왕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늦게 불러도 괜찮으니 즐거운 시간 보내길.'
아직은 잠잠한 통신석을 꽉 쥐었다.
데온과 마왕의 기묘한 관계는 예의 그 성당에서부터 시작했더랬다. 평소와 다름없이 따분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마왕은 익숙하지만 오래되어 잊고 있었던 감각을 느꼈다. 인간계에서 자신을 소환할 수 있는 계약진, 옛날 심심해서 마족 소환법을 적은 책을 인간계에 둔 적이 있었던 것도 같다.
'재밌네.'
인간계와의 전쟁 이후, 마족에 대한 인식이 최악을 달리면서 전부 소실되었다고 생각했다. 사특한 것들을 부르는 법으로 금서라 지정했다는 이야길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단 말이다. 하나가 남아서 어딘가에 보관되고 있었던 것일까? 기어이 금서를 찾아내어 자신을 부르는 인간에 흥미가 돋은 마왕은 부름에 응해주었다. 그리고 인간계에 소환되고 처음 본 광경에 폭소를 터뜨렸다.
"...날 불러낸 곳이 성당이라니!"
참을 수 없는 유쾌함이 일었다. 어떤 미친 인간이 마왕을 신성의 영역에서 불러낼 깜찍한 생각을 했을까?
이런 일을 벌인 인간이라면 분명 자신을 즐겁게 해줄 수 있을 터. 미약한 호감을 느낀 마왕의 시선이 이윽고 정면에 있는 인간에게 닿았다. 베일을 뒤집어쓴 남성. 벌떡 일어나서는 입을 벌리고 쳐다보는 인간의 눈에서 당황스러움과 경계심이 비쳤다. 시선을 잡아끄는 그것에 특이한 점을 발견한 마왕이 조소를 머금었다.
"붉은 눈?"
선명하게 번뜩이는 붉은 눈을 자세히 관찰하고자 베일을 뒤로 넘겨버렸다. 숨겨져 있던 하얀 머리카락이 손등을 간질이며 흘러내렸다. 진짜인가? 머리카락을 쓸어보자 상대가 흠칫 놀라며 뒤에 떨어진 베일을 잡아 허겁지겁 씌운다. 탐색하며 말을 고르는 듯한 모양새가 조심스러워 소동물이 떠올랐다.
"안녕, 눈토끼야?"
"...눈?눈토끼?!"
헛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거봐, 눈토끼 맞잖아. 실없는 생각이라는 자각은 있는 듯, 마왕이 싱긋 웃으며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이름을 모르니까?"
"...그게 중요한 일인가?"
제법 퉁명스러운 혼잣말이었다.
"그럼 중요한 일이지."
"..!"
'자기가 불러낸 것에 대한 자각은 있을 텐데?'
집중하고 있는 상대의 작은 소리 정도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들을 수 있는 걸? 아무래도 소환자께서는 마왕의 신체능력을 잘 모르는 듯했다.
'하긴 딱히 정보가 없으려나?'
혼잣말이 들렸다는 걸 깨달은 그가 품속에 책을 꽉 쥐었다. 그래 아마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정보를 담고 있을 그 책, 마족 소환법이 적힌 책 위에 두껍고 커다란 성서를 덧대어 들고 있는 것이 대충 몰래 들고왔다는 걸 알 수 있게 했다. 신전 놈들이 입는 하얀 사제복을 입고 있지만, 치부를 가리기 위해 사용하는 베일을 쓰고 다니는 남자아이. 그리고 신성함과 순결을 뜻하는 하얀색과 불길함을 뜻하는 붉은색을 함께 가지고 태어난 이질적인 외양까지, 그를 향한 모든 호기심을 기쁨의 형태로 여과 없이 드러냈다.
" 내 예비 계약자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제가 당신과 계약할 거라고 확신하시군요."
손가락으로 그가 입고 있는 옷과 품속의 책을 번갈아 가리켰다.
"고귀한 사제님께서 악마를 밤중에 몰래 불러낼 정도면 상당히 절실한 소원일 테니."
사제라는 호칭에 잠깐 눈썹을 찌푸린 그가 자신의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잠깐의 정적이 내려앉은 성당 안, 이내 수긍하듯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온 하르트입니다."
"그래, 데온."
만족스러운 결과에 냉큼 답을 한 마왕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우리 예비 계약자의 소원이 무얼까?"
"...들어주실 겁니까?"
마왕이 웃음을 흘린다. 소원을 물었는데 그 전에 들어줄 것인지를 먼저 묻다니.
'발칙하긴.'
말을 바꾸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확답을 원하는 것일지, 바라는 것이 너무 커서 그런 것인지. 데온이 주먹을 꽉 쥐는 게 보인다. 감정은 다르겠지만, 그 모양새가 기도를 떠올리게 했다. 인간들의 신이 보는 앞에서 사제가 악의 군주께 기도를 올리니, 그 재밌는 일에 마왕은 이미 데온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짓궂게 몰아붙였다.
"이게 계약이란 건 알고 있겠지?"
멍청한 선택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상기시켜주려고 일부러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었다. 힘을 줌에 따라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지만, 안광의 생기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소원이 클수록 그만큼의 대가를 요구할 거야."
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어주었다. 창백한 피부에 남은 목줄 같은 자국을 감상하며 눈을 접어 웃었다.
"이에 승낙한다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너는 꽤 재미있으니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줄게.'
데온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걸 두려워했다면 애초에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라는 듯 확실하게. 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되묻는다.
"그럼 이제 들어주시는 겁니까?"
"뭐, 그렇지?"
'소원을 말해봐, 데온.'
마왕이 귓가에 대고 야살스럽게 속삭인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 데온이 마왕의 멱살을 쉽게 낚아채며 으르렁거린다. 아까 목 붙잡힌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한 손은 자신의 붉은 목을 가다듬는다.
"제 소원은 형을 감옥에서 꺼내 주시는 겁니다."
"...형을 감옥에서?"
"예."
"그 말은 죄인의 탈출을 도우라는 건가?"
생각지도 못한 소원에 턱을 문지르던 마왕이 데온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부담스러운 시선인지 데온이 고개를 휙 틀어버린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림을 덧붙였다.
"...제 형은 죄인이 아닙니다."
"흠? 그럼 네 형은 왜 감옥에 갇힌 거지?"
"......제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 대답한 데온의 표정이 조소를 머금는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긴 데온이 눈만 돌려 마왕을 바라보았다. 계속해 보라는 듯 팔짱 끼고 삐딱하게 서 있는 모습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 진전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만 해도 짜증 나는 이야기에 입술을 짓씹은 데온이 말을 이어나갔다.
데온과 그의 형 크루엘은 어느 백작가의 공자였다. 데온은 백작가 사람들의 검은 머리와 초록 눈이 아닌 백발과 붉은 눈을 가지고 태어나 사교계에서 뒷말이 많이 나오는 하나의 가십거리로 다뤄지게 된다. 그중에 다른 불길한 종족인 뱀파이어가 붉은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하여 역겨운 시선들을 많이 받아왔었다. 특이한 생김새를 가진 아이, 다른 것에서 오는 미지의 두려움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은 그를 배척해 왔고 하필이면 불안한 시기에 급부상하여 세력을 키운 가상의 존재를 섬기는 종교 집단의 희생양으로 뽑혀 마녀 사냥을 당할뻔한 위기에까지 처하게 되었다. 신전 사람들에게 끌려가던 도중, 자신의 형인 크루엘이 몰래 데온을 빼내려 했었고 악독한 것을 도우려 했다는 죄목을 들어 먼저 처형시키려고 끌려간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모든 일의 시작에 있던 데온은 사람을 홀릴 정도로 악독한 것이라 신의 곁에 가기 전 정화 작업이 먼저 필요하다며 하루에도 몇 시간씩 기도를 드리고 허드렛일을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악독함의 상징으로 처리되어야만 하는 데온을 고립시키는 것과 동시에 공포를 통해 마녀를 같이 배척하는 게 옳다고 믿게 하는 것, 이를 통해 신전의 세력을 불리기 위해 크루엘은 먼저 처리되어야만 했던 것이라고 데온은 생각했다.
그렇기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느낀 데온은 온갖 방법을 써서 형을 구해내려고 했다.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았지만, 통하지 않았고 죄책감만 늘어나는 도중에 성서를 옮겨 적으며 반성하겠다고 들어간 도서관에서 금서를 발견한 것이었다. 다른 책들과 다르게 눈에 띄는 붉은 가죽 표지를 가진 그 책은 관리가 되지 않은 듯 군데군데 변색이 되어있었고 먼지가 쌓여 있었다. 호기심으로 가져온 것이 사특한 마법을 쓰는 마족 소환법이란 걸 알게 된 게 하루 전 일이었다. 마땅한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걸어본 것이 운 좋게 마왕을 소환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데온은 요점만 뽑아 얘기했다.
긴 이야기를 끝내자 침이 평소보다 무겁게 목구멍 너머로 삼켜졌다. 매번 이런 말을 늘어놓으면 신전 놈들은 악독한 것이 홀리려 한다고 막아섰다. 철저히 고립되었던 데온은 이딴 얘길 마왕한테 털어나 봤자 의미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저 저놈이 자세한 사정을 듣지 않으면 들어주지 않을 거라 냉정하게 판단했기에 선택한 행동, 데온은 마음을 다잡고 앞에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마왕은 미소 짓고 있었다.
"힘들었겠네."
'내가 강아지 소리를 들은 건가.'
"하..."
데온이 비웃음을 흘렸다. 아까 소원의 크기에 따라 대가를 가져간다며 겁을 주던 것이다. 신전 놈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이해했다. 차라리 계약의 형태라 마음 쓸 일도 없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심장 부근이 무겁게 내려앉는 듯 했다. 바람 빠진 소리만 나오는 입에서 뱉은 말은 처음과 같았다.
"...들어주실 겁니까?"
"안타깝지만 못 들어주겠는걸?"
"......예?"
산뜻한 어조로 부정의 뜻을 담긴 문장이 되돌아왔다. 데온은 눈을 치켜뜨고는 아까 나눴던 대화를 생각했다. 이거나 저거나 개ㅅㄲ네.
비꼬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다시 말이 들려왔다.
"아, 안 들어준다는 게 아니야. 못 들어준다고 했지."
"무슨 차이입니까?"
"흠... 어디서부터 설명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마왕이 설명을 시작한다.
"네 형은 이곳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겠지?"
"...예."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여기가 성역이니까.
"너희가 믿는 신은 가상의 존재면서도 실존하는 존재거든."
"...무슨 의미입니까?"
"그러니까... 생명체의 믿음이 한 대상에게 지속해서 이어지게 되면 진짜 힘을 갖게 된다고 할까? 덕분에 이곳은 성역 비슷한 것이 되었거든. 내 힘에 제약이 걸려서 인간 하나 빼돌리는 건 힘들 것 같은걸?"
데온이 욕을 내뱉었다. 괜한 이야기를 했다는 낭패감과 도움받지 못하리라는 것에 짜증이 일었다. 착잡한 기분에 고개를 숙이고 있길 잠시 마왕이 들뜬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
"대신 비슷한 가치의 소원으로 바꿔 들어줄게."
"비슷한 가치요?"
"그래, 잠깐은 형과 만날 수 있게 데려다 줄 수는 있을 것 같네. 한 달 동안 이 시간대에 찾아올 테니 얘기라도 해볼래?"
"그럼 그거라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지?"
여러번 되물어보는 말에 데온이 턱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거기 들어갈 수는 있다는 거 아닌가? 찝찝함이 일어났다. 자신에게는 형의 안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윽고 데온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 선택했다.
"좋습니다."
"그래, 계약 성립이야."
마왕이 손가락을 튕기더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완료된 건가? 데온은 실실 쪼개는 마왕의 면상을 보며 다짐했다.
'낌새가 이상하면 튀든가 해야겠다.'
사라지지 않는 묘한 느낌에 불쾌감과 찜찜함이 일어 데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사실 데온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
즐거운 과거를 회상하던 마왕이 바라보고 있던 통신석의 색이 변했다. 데온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 마왕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시간이 됐나 보네."
계약의 대가를 빠짐없이 받아낼 시간이다.
'아, 엄밀히 말하면 공평하지는 않은 계약이었지.'
마왕이 웃음을 삼켰다. 데온 하르트가 처음에 자신에게 부탁한 소원은 자신의 형을 감옥에서 빼내달란 것이었다. 마왕은 이를 들어주지 못한다고 했었지만, 그것 하나 못 하겠냐고. 데온의 계약 상대는 역대 최강의 마왕 칭호를 가진 이였다. 데온의 형을 빼내는 것쯤이야 눈 깜짝할 새 할 수 있지만 그러면 토끼가 도망가 버릴 거 아닌가?
마왕은 확신했다.
자신이 크루엘을 빼내준다면 데온은 미련없이 빨리 도망갈 생각이나 할 것이라고. 어렵게 찾은 장난감인데 오랫동안 만나면서 지켜보는 게 더 즐겁지 않겠냐고. 그렇기에 첫 번째 소원을 모른척 했다. 장난감을 확실히 갖기 위해서는 크루엘은 죽는 편이 마왕에게도 좋았으니까.
"의지할 곳 없어진 장난감을 손쉽게 차지하려 했었는데... 문제가 있었네?"
생각보다 그의 장난감은 너무도 발칙했다.
통신석을 입 가까이에 가져다 댄 마왕이 나긋하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바로 갈게, 데온."
다시 감옥으로 이동한 마왕은 창살 너머 크루엘을 한 번 확인한 후 데온을 붙잡고 기도실 안으로 데려왔다.
"이렇게 티를 내서야 하겠어?"
기도실에 도착하자마자 데온을 내려놓은 마왕이 멀리 떨어졌다. 데온의 품속에서 물이 흐르는 은 나이프를 꺼내 빠르게 휘둘렀다. 하지만 마왕은 예상이라도 한듯 그 전에 멀리 이동해 버렸지만. 기도실 안 미묘한 대치 상황에 먼저 말을 꺼낸 건 데온이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글쎄? 어떨 것 같아?"
"...알고 계셨군요."
의미심장한 물음에서부터 장난기를 읽은 데온이 이를 갈았다. 악독한 것을 정화하는 성수라는 것에 담가온 은 나이프를 꽉 쥐었다. 마왕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더니 품속에서 통신석을 꺼내 흔들었다.
"이거 말이야."
"..."
"사실은 영상석이랄까?"
"..!"
"네게 준 영상석이랑 연동되어 있어서 내 쪽에서 그쪽 상황을 볼 수 있게 해뒀거든."
"...하."
"꽤 귀여운 일을 벌이려 했네, 데온."
마왕은 데온에게서 연락이 오기 전에 다른 색을 띠고 있던 영상석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에는 크루엘을 구출할 방법을 마련한 것인지 크루엘의 탈출에 필요한 것을 품속에 숨겨온 데온, 그리고 크루엘이 마왕을 위험한 놈이라고 말하며 조심하라 일러둔 것에서 해치우고 형이 있는 곳에 찾아갈 것이니까 걱정 말라는 말을 한 것까지 다 듣고 있었다.
"그렇게 대가를 치르기가 싫었어?"
마왕은 처음으로 데온을 크루엘에게 데려다 주던 날, 소원의 무게가 같으니 기간의 끝에서 대가를 더 받아내겠다고 이야기했었다. 책에 써진 '계약의 대가로 마족이 인간계에서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 이외의 것을 받아내겠다고.
데온이 눈에서 경계심을 지우지 않고 마왕을 쳐다보았다. 마왕과 가까워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거리를 더 벌렸다. 기도실 단상에서 의자가 있는 곳까지 다다른 데온이 초조함에 문을 바라보는 것을 관찰한 마왕이 감추지 않고 비웃음을 흘렸다.
'이건 좀 다른 인간이랑 같은 것 같아 시시한걸.'
"대가로 걸었던 게 너무 모호하지 않습니까."
"그런가? 간결하고 명확해서 딱 좋다 생각했는데 말이지."
소름이 끼친 듯 식은땀을 흘리는 데온이 마왕에게 눈을 고정한 체 물었다.
그날 마왕이 대가로 받겠다 한 것은
"저를 대가로 받겠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건 데온 하르트 자신이었다.
데온은 이런 전개를 거지 같은 성서에서 본 적이 있다. 데온은 신을 믿지는 않지만, 하도 웃기는 말을 써놨다며 한 구절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악마는 계약의 대가로 계약자의 영혼을 요구하니 필시 믿어서는 안 된다.'
마왕이나 악마나 비슷한 것들로 분류되니 기억해 둬서 나쁠 것 없지 않은가? 심지어 마왕이 정말로 저를 달라는 말을 했으니 영혼을 가져가겠다는 걸 의미하는 게 분명하다.
'형을 빼돌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자신을 위해 희생할 생각마저 했던 크루엘을 위해서라도 데온은 그 대가만큼은 줄 수가 없다 다짐했다. 따라서 믿지도 않는 걸 다 찾아보고 무기까지 가져오는 노력을 해본 것이다.
저를 적대하는 데온을 본 마왕은 슬프다는 듯이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형이랑 함께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하네."
"그런데 데온? 우리가 계약으로 묶인 사이라는 거 기억하고 있지?"
마왕이 어린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듯한 투로 말을 한다. 잠시 알 수 없는 말을 읊더니 계약 때 느꼈던 묘한 느낌이 심장을 옥죄는 듯한 고통으로 변모하였다.
"약속을 안 지키면 안 되지?"
"...ㅅㅂ."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고통스러워하자 손에서 칼을 빼낸 마왕이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데온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조심스럽게 닦아내 주었다. 언제나처럼 베일을 벗긴 마왕이 데온의 얼굴을 돌려가며 감상하더니 넓은 옷 소매를 잡아당겨 뒤로 넘어지게 한다. 의자 위로 쓰러진 데온의 목을 움켜잡은 마왕은 상당히 즐거운 듯 보였다. 한쪽 손은 목을 움켜잡고, 다른 쪽 손은 데온의 뒷머리를 받쳐 주었다. 무게를 실어 몸을 기울인 마왕이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내가 진짜 갖고 싶어한 게 뭔지 알아?"
"..."
마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목이 붙잡혀 말을 뱉지도 못하는 데온을 무시한 채 마왕이 말을 이었다.
"근데 다르게 오해한 모양이네."
고개만 돌려 데온의 측면을 바라본 마왕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 바로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역안이 더럽게 무서웠다. 데온이 고개를 비틀려 하자 머리를 받쳐준 손에 힘을 주어 돌리지 못하게 한다.
"아무래도 제대로 알려주는 게 좋겠지."
'다시는 오해하지 못하도록.'
뒷 말을 삼킨 마왕이 데온의 어깨 위로 이를 박았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자 붉은 자국이 목에 원형의 둘레를 만들어 냈다. 마왕은 이를 보고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듯이 웃었다.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가지고 싶었거든."
마왕은 자신을 소환해낸 이가 당황스러움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때를 기억한다. 붉은 눈이 불길함에 상징이라고? 저렇게 예쁜 눈을 가진 아이를 인간들은 몰라본단 말이냐.
창백한 피부에 하얀 머리카락, 루비 같은 붉은 눈에 순수하게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씨를 가진 아이, 다른 사람을 원망하긴 했지만 끝내 자신에게 죄책감을 씌우길 택한 아이, 갇혀 지낸 세월 때문에 인간들의 욕망에 물들어지지 않은 아이.
누구보다 순결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닌가?
그렇기에 내 손으로 직접 물들여 보고 싶었다, 실로 새롭고 재미있는 장난감이 아닌가?
"네가 어떤 식으로 변화할지 너무도 궁금해."
두려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아이의 눈을 가려주며 코끝에 닿는 달콤한 향기를 느끼며 순결의 미를 맛보았다.
밤은 길 테니 너는 내게 모든 걸 맡기고 즐기기만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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